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쿠자와 유키치 (문단 편집) === 조선과의 관계 === 후쿠자와는 생애 전반에는 [[조선]]에 별다른 저술을 남기지 않았으나, [[강화도 조약]]를 앞두고는 조선에 대해 "스스로 조정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려 우리의 속국이 된다고 해도 기뻐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우습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455145|#]] 그러다 임오군란 사후 처리 사절로 방일한 [[김옥균]]과 만나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김옥균은 당시만 해도 후쿠자와를 신선 같은 인물이라고 평하면서 스승으로 모셨으며[* 물론 애초에 조선 개화파의 시초는 [[박규수]]가 있었고, 김옥균은 박규수->[[유홍기]]->김옥균 라인이긴 했다.], 후쿠자와도 김옥균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아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후쿠자와는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 개화파가 정치적 실각 위기에 처하자 [[갑신정변]]에 직접 개입해 반란의 성공을 위해 도검과 폭약 등의 무기를 조달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자택이 수색되고 재판정에 불려나가기도 했다. 실제 후쿠자와를 통해 무기를 조달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김옥균]], [[박영효]] 등 일파의 거사는 당초부터 선생이 관여하고 듣고 계신 바이다. 선생은 단지 그 대본의 작자임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배우를 선택하고 배우를 가르치고 또한 필요한 도구를 갖추는 등 만반의 수단을 강구한 사실이 있다"는 증언을 남겼다. 물론 후쿠자와는 자서전인 후쿠옹자전에서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뗐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조선 근대화에 대한 개입은 단순히 '조선의 근대화에 열의를 보인 후쿠자와'라는 평가에서 '메이지 유신의 모델을 조선에 강요한 후쿠자와', 심지어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 후쿠자와'에 이르기까지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다만 갑신정변 시기까지는 후쿠자와가 어느 정도 아시아 각국의 연대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며, 조선인에게는 [[한글]]이 가장 알맞으니, 국한 혼용체를 사용하여야 한다며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장도 하였다. [[게이오기주쿠대학|게이오기주쿠]]를 세우고 교육이야말로 문명화, 근대화의 열쇠라고 주장했던 만큼 [[한자]]만으로는 서양의 학문이나 사상의 습득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자신의 사재로 한글 활자 주조 비용도 지원을 했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최초의 국한 혼용 신문이 바로 한성주보였다. 이렇듯 후쿠자와 유키치는 생애 전반기에는 [[아시아주의|아시아 인민들의 각성과 계몽]]을 통해서 연대를 도모하고, 거세게 밀려오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다같이 근대화에 나서자는 주장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민중 경멸 발언과 제국주의 야욕이 엿보이는 주변국 혐오 발언 또한 서슴치 않았다.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김옥균]] 등이 [[1884년]] 일으킨 [[갑신정변]]에 도검과 폭약 등의 무기를 조달해서 [[갑신정변]]을 지원하였고 일본 자유당의 민병대 청년들을 보내 추가 지원하려고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갑신정변이 끝나고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반역]]죄였기 때문에 반역죄에 적용하던 조항대로 처벌을 내렸다.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 독립당의 처형'이라는 글을 게이오기주쿠에서 발행하던 신문 '시사신보'에 싣는다.[[http://ja.wikisource.org/wiki/%E6%9C%9D%E9%AE%AE%E7%8B%AC%E7%AB%8B%E5%85%9A%E3%81%AE%E5%87%A6%E5%88%91|#]] 이 글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를 처형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조선 정부가 죄 없는 부모, 조부모와 처 자식, 나이 어린 손자까지 처형하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야만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한 글이었다.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세 달 뒤인 [[1885년]] [[3월]]에 [[탈아론]]을 발표한다. >조선의 민중이 크게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은 오히려 조선의 멸망이다. 조선은 사지가 마비되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병자와 같다. 진보의 길을 모르고 도덕이 땅에 떨어진데다가 잔혹함과 몰염치는 극에 달하고 오만방자하다. 조선은 논할 가치가 없다. 조선 민중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민중을 구제하는 길이다. 조선 정부는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며, 지배층은 국민의 권익 보호에 관심이 없고 일반 백성들조차도 부패와 탐욕, 위법 행위를 자행하는 등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의 세습과 부정부패판인 조선의 멸망은 당연한 것이므로 머지않아 조선이 멸망할 것임을 예견하며 조선 민중을 위해서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 조선은 부패한 유생의 소굴로서 뜻이 큰 인물이 없고, 국민은 노예로 살고 있다. 조선은 학자는 있지만 다만 중국의 문자만 알 뿐이다. 그 나라를 평가한다면 글자를 아는 야만국이라 하겠다. >[ruby(人間娑婆世界, ruby=にんげんしゃばせかい)]の[ruby(地獄, ruby=じごく)]は[ruby(朝鮮, ruby=ちょうせん)]の[ruby(京城, ruby=けいじょう)]に[ruby(出現, ruby=しゅつげん)]したり。[ruby(我輩, ruby=わがはい)]はこの[ruby(国, ruby=くに)]を[ruby(目, ruby=もく)]して[ruby(野蛮, ruby=やばん)]と[ruby(評, ruby=ひょう)]せんよりも、むしろ[ruby(妖魔悪鬼, ruby=ようまあっき)]の[ruby(地獄国, ruby=じごくこく)]といわんと[ruby(欲, ruby=ほっ)]する[ruby(者, ruby=もの)]なり。 >---- >인간 사바세계의 지옥이 조선의 한양에 출현했다. 나는 조선을 보고 야만국보다는 요마악귀의 지옥국이라 평하고자 한다. '''조선 인민 일반의 이해(利害)가 어떤지를 논할 때는 (조선의) 멸망이야말로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크게 하는 방편'''이라는 말 역시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제적이고 봉건적인 조선 정부가 멸망하고 (일본의 메이지 정부와 같은) 근대적 정부가 성립해야만 조선 인민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http://ja.wikisource.org/wiki/%E6%9C%9D%E9%AE%AE%E4%BA%BA%E6%B0%91%E3%81%AE%E3%81%9F%E3%82%81%E3%81%AB%E5%85%B6%E5%9B%BD%E3%81%AE%E6%BB%85%E4%BA%A1%E3%82%92%E8%B3%80%E3%81%99|원문]]. 그는 "인민의 생명도 지키지 않고,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 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오히려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라고 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졌을 당시에는 "조선 인민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 조선인의 완고 무식함은 남양의 미개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라고 비난하였다. [* 참고로 후쿠자와는 [[청일전쟁]] 당시 중국에 대해서도 "중국인은 장구벌레, 개돼지, 거지, 오합산적이다."고 비난하면서 일본을 옹호했는데, 타국의 아픈 점은 잘 건드리면서도 자국의 문제에는 눈을 감던 아니 오히려 조장하는 측면도 있던 당시 유키치의 모습을 보여준다.][[https://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26197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